한국전력공사(KEPCO)가 논란의 중심에 섰다. 지난 4일 서울 여의도 면적의 두 배에 달하는 산림 530㏊와 주택 500여 채를 태운 강원도 고성·속초 산불을 일으킨 최초 발화점이 한 전신주의 개폐기(전기 스위치 역할을 하는 장치)로 지목되면서 한전의 부실관리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적자에 신음하는 한전은 지난해 전신주에 달린 변압기와 개폐기 등 배전설비 유지보수 예산을 삭감했다. 통상 한전은 적자가 쌓이면 연구·개발(R&D), 유지보수, 신규투자의 순으로 예산을 줄인다. 한전은 배전설비 유지보수 예산을 2017년 1조8621억원에서 2018년 1조4418억원으로 22.6% 줄였다. 유지보수 예산 중 설비 교체·보강 예산은 1조5675억원에서 1조1470억원으로 26.8% 줄였으며, 점검수선 예산은 2946억원에서 2948억원으로 0.06% 늘렸다.
김삼화 바른미래당 의원은 지난해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 국정감사에서 “한전이 배전설비 유지보수 예산을 늘려오다가 적자 때문에 갑자기 줄여도 되느냐”고 지적한 바 있다. 배전 기자재 납품업계에서는 한전이 약 20년의 수명을 가진 배전 기자재 구입량을 지난해 전년 대비 40%가량 줄였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한전은 전신주 개폐기 외관과 내부의 설치 상태를 점검하는 ‘광학카메라 진단’을 2017년 11월 이후 한 차례도 진행하지 않았다. 한전 관계자는 “광학카메라 진단은 규정상 매년 의무적인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진영 행정안전부 장관은 9일 한전의 과실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결론이 날 경우 적극적으로 배·보상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국립과학수사원의 화재 원인에 대한 명확한 조사결과는 5월 중 발표된다.
2011년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멜트다운(원자로 냉각장치의 고장으로 노심(爐心)이 녹아 방사능이 유출되는 것)’ 사태도 안일한 관리에서 비롯됐다. 도쿄전력은 앞서 토목학회에 의뢰해 쓰나미에 대비하기 위해 방조제를 더 높게 세워야 한다는 답을 얻었지만, 이를 실제 건설로 연결시키지 않았다. 당시 도쿄전력은 적자 상태였으며 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 기술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지역감정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쓰나미 위험을 숨겼다. 결국 이는 대재앙으로 이어졌다.
전력은 모든 산업의 기초이자 국가 전역에 걸친 대규모 인프라다. 국내에서 전력 발전사를 자회사로 두고 송전·변전·배전·판매를 전담하는 한전은 한국전력공사법에 근거한 시장형 공기업이다. 법에 명시된 한전의 설립목적은 ‘전력수급 안정을 도모하고 국민경제 발전에 기여한다’이다. 2만 명 넘는 전문성을 가진 임직원이 몸담고 있는 한전은 과연 이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권 따라 휙휙 변하는 에너지정책 탓에, 또 때로는 과도한 규제 탓에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보수적인 기업문화에 더해 이공계 여부 등 출신 성분 간 소통이 부족한 점도 조직적인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해외 시장 개척도 발전 부문에 치우쳐 있다.
에너지정책은 ‘국가백년대계’라고 불린다. 그만큼 장기적인 관점에서 수립·시행돼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남의 얘기다. 녹색성장·창조경제·탈원전·수소경제 등 정권마다 들고 나오는 전력 관련 정책 청사진이 다르다 보니 한전 및 에너지업계가 몇 년 만에 정부정책 관련사업 및 기술개발을 하다가 이를 접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또 사실상 발전원가에 연동해 조정할 수 없는 전기요금 산정체계에 더해 발전비용이 많이 드는 정권의 탈원전 추진까지 겹치면서 한전은 적자의 늪에서 허덕이고 있다.
공기업은 사기업과는 달리 이윤추구가 지상과제는 아니다. 그러나 한전의 적자누적은 자칫 ‘블랙아웃(대규모 정전)’ 등의 국가적인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 최근 한전의 적자원인으로 탈원전이 꼽힌다. 발전원가가 가장 저렴한 원전의 지난해 가동률은 37년 만에 처음으로 65.7%로 추락했다. 핵 위험을 제거하자는 취지는 좋지만 당장 원자력 발전비용이 저렴하기 때문에 탈원전에 따라 발생하는 비용을 사회적으로 감수할 준비가 돼 있어야만 한다. 이에 대해 적지 않은 전문가들은 비전문가 그룹의 정치적인 결정으로 탈원전이 너무 급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우려한다.
에너지 신시장 1경5000조원 규모
한국은 사실상 ‘섬’인 지정학적인 이유로 역사적으로 ‘에너지 안보(전력 자립)’의 중요성이 매우 강했다. 그러나 전력은 융·복합 시대 큰돈이 되는 사업이다. 튼튼한 에너지 안보 바탕 위에서 국가 성장동력으로 전력을 키울 수 있다는 뜻이다. 에너지 신시장은 2030년이 되면 12조달러(1경5000조원)로 커질 전망이다. 현재 세계 인구 중 약 25%는 전력 공급이 안 되는 곳에 산다. 나머지 75% 중에서도 절반 정도만 전력을 풍족하게 쓸 수 있다.
미국 제조업의 상징인 GE는 전력회사로 방향을 틀기 위한 구조개편에 한창이며 일본 손정의 소프트뱅크 사장은 한·중·일 전력계통을 연결시키는 ‘동북아 수퍼그리드’를 추진하기 위해 한국에 10년간 5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는 앞으로 전력산업을 어떻게 키우느냐에 따라 통신기술(IT), 전자 등 산업 간 융·복합을 통해 미래 산업의 핵심이 될 수도 있다는 방증들이다. 실제 해외 에너지기업들은 변신을 통해 글로컬(글로벌+로컬) 시장에서 돈을 벌고 있다.
한국에도 기회는 있다. 한국 전력산업의 가장 큰 특징은 다름 아닌 한전이라는 강력한 전문가 집단이 있다는 점이다. 한전은 발전(발전 자회사 지분 100% 보유)부터 송전·변전·배전·판매까지 사실상 독점하는 거대한 기업이다. 한국의 전기 품질은 이미 연간 정전 시간, 주파수 유지율, 전압 유지율 등의 측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다. 발전 분야 기술도 상당 부분 자립화했다. 2016년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Forbes)’는 전력유틸리티 부문 세계 1위 기업으로 한전을 꼽기도 했다.
한 전직 한전 사장은 ‘이코노미조선’과 만나 “한전이 100년 전부터 하던 전력 발전과 판매를 통한 수익창출 모델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ICT와 융합해 전력 절감 솔루션(스마트그리드 등)을 개발하는 회사 등으로 ‘사업의 변화’를 꾀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IT와 배터리 강국이자 세계 1위 전기품질을 가진 전문가집단이 있기 때문에 이미 기반은 마련돼 있다”고 강조했다. 에너지업계 관계자들은 “정부가 규제를 획기적으로 풀어 새로운 에너지 분야를 적극적으로 키울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신남방정책’과의 연관성도 있다. 한전 고위 관계자는 “과거 한국은 해외 차관을 받을 때 전 세계 선진국으로부터 전기설비를 현물로 들여왔다”면서 “한전 기술자들은 사실상 ‘만능’인데 능력이 다 사장되고 있어 동남아시아 진출 등으로 성과를 내야 한다”고 했다.
극복해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 한전은 임기 3년 사장을 둔 공기업인 관계로 중장기적인 리더십의 발휘가 어렵다. 때로는 낙하산 사장이 한전 및 자회사 사장으로 내려오기도 한다. 일각에서는 한전이 보수적인 문화를 깨고 도전적인 창의성을 발휘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코노미조선’은 에너지업계와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이뤄진 설문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한전의 개선방안에 대해 짚어본다. 아직 늦지 않았다.